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발해는 고구려의 정치·문화·영토를 이어받으며 사실상 두 번째 고구려로 성장했다.
고구려의 멸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신호였다
고구려는 668년 당·신라 연합군에게 멸망했지만, 그 붕괴는 곧바로 ‘국가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강대한 국가였던 고구려는 넓은 영토와 다양한 지역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멸망 직후에도 곳곳에서 저항과 재건 시도가 이어졌다. 고구려의 군인·귀족·평민들은 각지로 흩어졌지만, 왕조를 복구하려는 의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서론에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은, 고구려의 멸망 자체가 하나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된 역사적 변형’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은 남쪽에서, 서쪽에서, 북쪽에서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부흥을 시도했으며, 이 흐름이 결국 발해 건국까지 이어졌다. 다시 말해 고구려사는 668년에서 갑자기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 700년대 이후까지 계속 확장되는 장기적 역사라는 점이 중요하다.
검모잠·안승의 부흥 운동과 발해 건국으로 이어진 계승 구조
고구려 멸망 직후 가장 먼저 등장한 부흥운동은 검모잠이 이끈 '한성(황해도 일대) 부흥운동'이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을 모아 왕족 안승을 영주(대동강 일대) 지역의 임시 왕으로 추대했고, 당군과 신라군에 맞서 저항을 펼쳤다. 그러나 내부 갈등과 외부 압박으로 검모잠 세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 뒤 안승은 신라로 망명해 '보덕국 왕'으로 책봉되었고, 신라 군사 체계에 일부 편입되었다. 이는 남쪽에서의 부흥운동이 정치·군사적 한계로 인해 장기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북방에서는 완전히 다른 흐름이 전개되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이끈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 계승’을 공식적으로 표방했고, 정치 제도·관등 체계·문화·복식·장군제 등에서 고구려적 요소를 강하게 유지했다. 발해의 수도 위치·영토 범위·고구려식 성곽 축조 방식은 모두 고구려의 북방형 국가 성격을 계승한 결과였다. 발해는 이후 당나라와 대등한 외교를 펼치고 북방·연해주·만주 일대를 장악하며 ‘해동성국’으로 성장했다. 이는 고구려 유민의 정치적 에너지와 군사적 전통이 북방에서 화려하게 되살아난 대표적인 사례이다. 요약하자면, 고구려 부흥운동은 남쪽에서는 실패로, 북쪽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 전체가 ‘고구려 계승’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연속선이었다.
고구려의 역사는 멸망 이후에도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고구려 부흥운동과 발해 건국 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멸망은 결코 종말이 아니었다. 유민들은 저항을 시도하며 국가의 부활을 꿈꾸었고, 발해는 실제로 고구려의 제도·문화·영토 전통을 이으며 사실상 ‘제2의 고구려’ 역할을 수행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고구려는 668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마지막 장은 멸망이 아니라 ‘계승’이며, 그 계승의 중심에 부흥운동과 발해가 존재한다.